방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다 보았다. 박해영 작가의 작품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드라마다.

지난 2주 동안 나는 그녀의 작품 세 편을 연달아 보았다: 나의 아저씨, 또 오해영(We Are All Trying Here),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세 편의 드라마를 쉼 없이 몰아보았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번 보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글은 하나의 철학적 가르침에 가깝다. Google Gemini에게 물어보니,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영향을 준 철학자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다고 한다. 모든 것은 작가 자신의 고통과 삶의 궤적에서 길어 올린 것이었다. Gemini는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를 언급했는데, 왜 그런 비유를 들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그녀의 인물들은 삶의 공허함과 치열하게 싸운다. 그들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단조롭고 지난한 일상에 갇혀 있다. 눈을 뜨고, 만원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일하고, 집에 돌아와 잠에 든다. 그리고 반복.

하지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허무라는 심연을 너무 빤히 응시하느라 보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곁에 이미 그토록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

박해영 작가는 우리에게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가슴을 저미는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듯하다: 평범하고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우리들 대부분은 남은 생 동안 정확히 그렇게 살아가다 조용히 세상을 떠날 것이다. 우리는 유명해지지도 않을 것이고, 세상을 바꾸지도 못할 것이며, 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통근길조차 바꾸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서글픈 삶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누군가를 아끼고, 내 곁의 가까운 사람에게 단 하나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껴지지만,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쥐고 있다. 제대로 바라보기만 한다면.

사랑하려 애쓰지 마라

여기서 이야기는 한층 더 흥미로워지고, 카뮈의 시선과도 맞닿는다.

보살피려 애쓰지 마라. 바꾸려 들지 마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마라. 심지어 사랑하려조차 애쓰지 마라—사랑하려고 ‘애쓰는’ 순간 그것은 일종의 거래(transactional)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점수를 매기게 되고, 보답을 바라게 된다.

대신 그저 누군가를 온전히 추앙하라. 그저 모든 것을 내어주어라.

그것이 바로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이 지안에게 건넨 태도다. 그리고 지안이 동훈에게 보낸 마음이다. 동훈은 지안을 구원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의 처지를 뜯어고치려 하지 않는다. 섣부른 훈계나 조언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그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그녀가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대한다. 그리고 지안 또한 동훈에게 똑같이 응답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육체적으로 맺어지지 않고도 온전한 영혼의 동반자가 된다.

나의 해방일지의 미정도 구씨에게 똑같이 다가간다. 그녀는 그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술을 끊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위기 개입을 시도하거나 최후통첩을 날리지도 않는다. 그저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 준다. 그와 함께 존재한다. 그를 위해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게 전부다. 그것이 그녀 철학의 전부다.

번역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들

해외 시청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자막을 통해 드라마를 볼 때 그들이 놓칠 수밖에 없는 결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박해영 작가의 대사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단 한 줄도 허투루 쓰인 것이 없다. 말의 리듬, 어휘의 선택, 단어와 단어 사이에 흐르는 정적—이 모든 것은 번역의 과정을 온전히 통과하지 못한다. 의미는 전달될지언정, 그 대사가 품은 고유의 음악성은 사라져 버린다.

박해영 작가는 줄거리를 밀고 나가기 위해 대사를 쓰지 않는다. 한 인간의 내면을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 대사를 쓴다. 동훈이 툭 내뱉는 단 한 문장만으로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지 모든 것이 전해진다. 일상적인 구어를 통해 쌓아 올리는 인물의 묵직한 밀도는 한국어만이 유려하게 담아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며, 영어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버거운 영역이다.

그녀의 작품을 본 사람이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이다. 아직 보지 않았다면 나의 아저씨부터 시작해 보길 권한다. 다만, 자막을 통해 보는 것은 그 작품이 품고 있는 진짜 울림의 70%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