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현실이 있다. AI는 신약 개발의 ’전반부’를 분명히 혁신했다. 하지만 ’후반부’는 단 한 발짝도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신약 후보 물질들이 죽어나가는 무덤은 바로 그 후반부에 있다.
무슨 뜻인지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전반부: AI가 실제로 기적을 만드는 곳
사람을 대상으로 시험하기 전까지 신약 개발은 크게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
- 체내 어떤 단백질이 질병을 일으키는지 찾아낸다 (표적 발굴, Target Identification)
- 그 단백질에 달라붙을 수 있는 분자를 찾아낸다 (히트 발굴, Hit Finding)
- 그 분자를 더 강력하고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개량한다 (선도물질 최적화, Lead Optimization)
- 환자가 먹었을 때 독성으로 죽지 않을지 미리 예측한다 (ADMET 예측)
AI는 이 네 단계 모두에서 진정으로 탁월한 역량을 보여준다. 과장이 아니다.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이 이를 명확히 증명했다. 이들은 자체 AI 플랫폼을 활용해 폐섬유증의 새로운 표적을 발굴하고, 완전히 새로운 분자를 처음부터 설계하여, 단 30개월 만에 인체 임상에 진입시켰다. 업계 평균이 4~6년 걸리던 일이다. 이는 피어 리뷰를 거쳐 공식 학술지에 발표된 실재하는 성과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AlphaFold)는 2억 개 단백질의 3차원 구조를 예측해 냈다. 지난 50년 동안 전 세계 과학자들이 수작업으로 규명한 구조가 약 10만 개였음을 감안하면 구조 생물학 지식이 무려 2,000배 확장된 셈이다.
생성형 AI는 이제 지구상에 존재한 적 없는 완전히 새로운 분자를 발명해 낸다. 자연계를 뒤져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듯 백지상태에서 분자를 조립한다. DALL-E나 스테이블 디퓨전의 밑바탕이 된 확산 모델(Diffusion Model)이 3차원 분자 구조를 생성하는 데 응용되고 있다.
이것들은 실존하는 능력이다. 환상이 아니며 리커전(Recursion), 아이소모픽 랩스(Isomorphic Labs), 제너레이트:바이오메디신(Generate:Biomedicines), 아톰와이즈(Atomwise) 같은 유수의 바이오텍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업에서 활용하고 있다.
후반부: AI가 (아직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곳
하지만 여기서부터 불편한 진실이 시작된다.
아무리 전도유망한 분자를 손에 쥐었더라도 다음 관문들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 세포 수준 시험 (실제로 작동하는가?)
- 동물 시험 (동물이 죽지 않는가?)
- 임상 1상 (사람에게 투여해도 안전한가?)
- 임상 2상 (사람에게서 진짜 약효가 나타나는가?)
- 임상 3상 (기존 표준 치료제보다 더 우수한가?)
- 미국 FDA 승인 (규제 당국을 설득할 만큼 데이터가 탄탄한가?)
- 대규모 상업 생산 (수억 알의 알약을 균일한 품질로 찍어낼 수 있는가?)
AI는 이 과정들에 거의 아무런 손도 대지 못한다.
물론 AI가 설계한 분자의 임상 1상 통과율은 80~90%로, 역사적 평균인 52%를 훌쩍 웃돈다. 이는 의미 있는 진전이다. 하지만 임상 2상과 3상으로 넘어가면? 성공률 개선 효과는 제로에 가깝다. 컴퓨터가 분자를 설계했다고 해서, 복잡미묘한 인체 안에서 약물이 실제로 질병을 치료해 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생물학적 난제가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2026년 7월 현재 기준으로, AI가 발굴하여 FDA 승인을 최종 통과한 신약은 단 한 개도 없다. 가장 앞서가는 인실리코의 렌토세르팁(rentosertib)조차 이제 막 임상 2a상을 마쳤을 뿐이다. 앞으로 2b상, 3상, 대량 생산 밸리데이션, 규제 심사까지 아직 수년의 세월이 남아 있다.
70억 달러짜리 질문
2026년 1월 이후 글로벌 제약사들이 AI 신약 개발 파트너십에 쏟아부은 확약 자금만 70억 달러(약 9조 6,000억 원)가 넘는다. 인실리코 한 곳만 해도 세르비에(Servier), 일라이 릴리(Eli Lilly), SK바이오팜, 다케다(Takeda)와 연이어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70억 달러의 돈이 투입되었는데, 승인된 약은 0개다.
이것이 사기라는 뜻은 아니다. 거대한 ’투자 가설’이다. 초기 설계가 뛰어난 분자일수록 후기 임상에서도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믿음에 제약사들이 판돈을 걸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베팅이지만, 아직 그 가설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
2025년 기준 전체 AI 신약 개발 시장 규모는 약 26억 달러다. 맥킨지는 생성형 AI가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제약업계에 연간 600억~1,100억 달러를 절감해 줄 것이라 추산한다. 하지만 이는 전망치일 뿐, 아직 현실의 숫자가 아니다.
’블랙 스완’의 역설
AI 신약 업계 관계자들이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는 날카로운 비판이 하나 있다.
밀라드 알루코자이(Milad Alucozai)가 정곡을 찔렀다. 현대 의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꼽히는 리피토(Lipitor), 글리벡(Gleevec), 사이클로스포린(Cyclosporine)은 모두 수십 년간 의약화학의 절대적 기준이었던 ’리핀스키의 5규칙(Lipinski’s Rule of 5)’이라는 분자 필터를 정면으로 위반한 약물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지금의 AI 신약 개발은 바로 그 규칙과 필터들을 수십억 달러 규모로 자동화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필터는 쓰레기를 걸러낼 뿐이다. 필터가 금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알루코자이의 일갈이다.
돌파구가 되는 혁신 신약들은 살아 숨 쉬는 인체라는 유기체 안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반응하며 탄생했다. 과거의 데이터로 모델을 학습시키면, 모델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합의(consensus)’ 쪽으로 편향될 수밖에 없다. 기존 틀을 깨는 생물학적 깜짝 선물(biological surprise)을 만들어내는 일에 구조적으로 취약한 것이다.
이는 데이터를 더 붓는다고 해결될 버그가 아니라,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다.
2025~2026년의 주요 변화들
최근 몇 년간 업계의 지형도 크게 바뀌었다.
리커전-엑스센티아(Recursion-Exscientia) 합병 (2024년 8월): 가장 큰 구조적 사건이었다. 리커전은 매주 수백만 장의 세포 이미지를 쏟아내는 대규모 표현형 스크리닝(phenotypic screening) 역량을 가졌고, 엑스센티아는 선도물질 최적화와 BMS 파트너십을 쥐고 있었다. 이 합병은 순수 AI 바이오텍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규모가 필수적임을 보여주었다.
알파폴드3(AlphaFold3) 등장 (2024년 5월): 단일 단백질 구조 예측을 넘어 단백질-DNA, 단백질-RNA, 그리고 신약의 핵심인 단백질-리간드 간의 결합 상호작용까지 예측하기 시작했다. 다만 학습 데이터가 부족한 희귀 결합 패턴에 대해서는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한계가 있다.
확산 모델(Diffusion Models)의 대세화: 단백질 설계에는 RFdiffusion, 저분자 화합물 설계에는 DrugGEN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미지 생성과 원리는 같다. 무작위 노이즈에서 출발해 유효한 분자 구조가 나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정제해 나가는 방식이다.
FDA의 AI 지침 초안 발표 (2025년 1월): AI가 적용된 300건 이상의 의약품 개발 신청서를 검토한 뒤, 위험도 기반의 신뢰성 평가 프레임워크를 제시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준이지만, AI 설계 신약에 대한 규제적 수용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다.
임상 진입 파이프라인 급증: AI가 발굴한 약물 프로그램 중 임상 시험에 진입한 파이프라인이 173개에 달한다. 2023년 말 24개 수준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26년에는 이 중 15~20개 파이프라인이 중대한 후기 임상에 돌입할 예정이다.
냉정한 현실 진단
우리가 서 있는 실제 위치는 다음과 같다.
신약 개발의 ‘전반부’ — 타깃을 찾고, 분자를 빚어내고, 물성을 예측하는 과정 — 는 AI 덕분에 경이로울 정도로 빨라졌다. 수년이 걸리던 일이 수개월로 줄었고, 수천억이 들던 일이 수십억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이것은 실재하는 혁신이다.
하지만 ‘후반부’ —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시험, 인체 내 효능 입증, 규제 당국의 승인, 공정 상업화 — 는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AI가 존재한다고 해서 복잡한 인체 생물학이 더 단순해지지도 않고, 임상 시험에 걸리는 시간이 저절로 단축되지도 않으며, FDA가 승인 절차를 건너뛰어 주지도 않는다.
결국 지금 업계는 신약 개발에서 가장 싸고 빠른 영역을 극적으로 가속하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반면, 가장 비싸고 가장 느린 영역은 여전히 옛 모습 그대로 멈춰 서 있는 형국이다.
이것이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순서의 문제일 뿐이다. 전반부에서 거둔 눈부신 승리가 후반부 임상의 승리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아직 그 번역의 결과물이 도착하지 않았을 뿐이다.
결론
AI는 초강력 돋보기이자 눈부시게 빠른 계산기다. 수백만 개의 분자 후보를 수백 개로 압축해 주고, 초기 분자를 훨씬 정교하게 빚어주며, 잠재적 부작용을 조기에 경고해 준다.
하지만 마지막 판결을 내리는 것은 언제나 인체 생물학 그 자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AI가 설계한 신약이 사상 처음으로 FDA의 최종 승인을 통과하는 날, 그것은 진정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2026년에서 2027년 사이가 그 첫 시험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가 내려야 할 솔직한 평가는 이것이다. “AI는 쉬운 일들을 눈부시게 빠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진짜 어려운 일들은 여전히 어렵게 남아 있다.”
참고자료: Clinical Trial Vanguard, IntuitionLabs, OncoDaily, PDP Spectra, BioMed Nexus, Nature, Drug Target Review, arXiv, FDA.